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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김의 할렘에서 월스트릿까지-파이낸셜 디스트릭트 (16)]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취가…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에서 브로드웨이를 따라 남쪽으로 쭉 걸어가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보도를 따라 검은 띠들이 줄줄이 박혀 있다. 그 검은 돌판에는 간략한 글귀가 있는데 연도와 특정 인물의 이름·직위 등의 간략한 정보다. 물론 그들은 한 국가의 대통령이거나 유명 운동선수·공을 세운 군인·그리고 우주비행사·남극탐험가 등의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긴 하다. 하지만 그들이 왜 이 바닥 돌로 여기 박혀 있는지는 많이들 고개를 갸우뚱한다. 주말 오후에 이곳을, 그날따라 모임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지나간 적이 있었다. 나도 궁금했는데 다른 미국 사람들도 그랬나 보다. 한 아주머니가 발걸음을 옮기던 인솔자 할머니에게 “도대체 이게 뭐죠?” 하고 물으니, 너무나 간단하게 “티커 테이프(Ticker Tape) 행진한 거야”라고 대답하셨다. 티커 테이프는 1867년에 발명되어 주식 시장에서 사용되던, 증권 시세 표시기에 끼우는 가느다란 종이 두루마리다. 이 기계가 인쇄할 때 “틱틱”거리는 소리를 내서 티커라 이름 붙여졌고 종이 역시, 티커 테이프가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에는 많은 증권회사들이 포진해 있다. 이에 퍼레이드가 열릴 때 이 브로드웨이 양쪽의 높은 빌딩들에서 자기들이 사용한 폐 티커 테이프를 엄청나게 뿌려댔다. 조각조각 자르기도 하고, 우리가 두루마리 휴지 던지듯이 이 테이프를 옥상에서 길게 던졌다. 그래서 뉴욕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의 거리행진은 티커 테이프 행진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1945년 8월 14~15일, ‘대한민국의 광복절 행진’은 가장 환영받은 퍼레이드 중 하나다. 일본의 패전 선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남을 기념한 거리행진이었다. 진주만 피격으로 한때 상실에 빠졌던 미국인들, 이때 이 짧은 길에 무려 5,438t의 티커 테이프와 색종이를 뿌렸다. 이다음 순위는 1962년의 우주비행사가 받은 3,474t이다. 하지만 2009년의 뉴욕 양키스의 월드 시리즈 제패 기념 거리행진에서는 단 36.5t의 폐지가 나왔다. 이런 거리행진은 무척 화려하지만 한순간 지나가고 마는 무형의 것이다. 이에 1996년 어떤 사람이 축제를 지켜보고 있다가 소중한 역사를 남겨두는 게 어떨까 하는 제안을 했다. 이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의 상인들이 모여 만든 단체(Alliance for Downtown New York)에서 사업을 추진했다. 이에 피아노의 검은 건반처럼 검은 띠 모양의 화강암에 글자를 박아넣기 시작했다. 물론 파이낸셜 디스트릭트 최초의 행진인 1886년의 자유의 여신상 건립 축하 행진부터 소급해서 말이다. 그래서 현재 브로드웨이의 배터리 공원 지점부터 시청까지 200개의 기념 바닥돌이 있고 미래를 위해 남겨둔 수십 개의 자리가 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성가신 발걸음 사이에서 글자를 읽는다. “윈스턴 처칠이 왔었네, 베를린 올림픽의 육상 영웅 제시 오웬스도, 대서양 비행횡단에 성공한 찰스 린드버그도 퍼레이드를 했구나, 아이젠하워는 두 번이나 했네” 하고 중얼거린다. 여기에 놀랍게도 대한민국 대통령들도 있다. 어느 날 길에 고개를 처박고, 퍼레이드 연대기를 거꾸로 하나하나 읽으며 내려가고 있었더랬다. 어느 돌 위를 성큼 내딛는데 승만 리, 남한 대통령(Syngman Rhee, President of South Korea)이란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깜짝 놀라 내딛던 발목을 접질릴 만큼 놀랐다. 어머나, 왜 이게 전에는 안보였을까. 우리의 대통령 이름이 맨해튼에서도 가장 번화한 파이낸셜 디스트릭트에 저렇게 새겨져 있다니, 참 신기하고 고맙기까지 했다. 전쟁 직후의 가난한 약소국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나라가 그 화려한 행진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4년에 행진을 했고, 이후 박정희 대통령도 퍼레이드를 했다. 하나 더 신기한 것은 이 바닥 돌에서 ‘Korea’가 자주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한국전 참전 용사들의 귀환 때마다 벌어진 행진 때문이다. 그분들은 노병은 죽지 않음을 과시하며 1991년에도 행진을 했다. 심지어 대전이라는 도시 이름도 덕분에 이곳에 선명히 박혀 있다. 이승만 대통령 티커 테이프는 에쿼터블 빌딩 앞에, 대전 전투는 트리니티 교회 앞에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현재로선 볼 수 없다. 그분이 있던 자리 뒤로 거대한 빌딩 공사가 시작된 탓에, 보도까지 막아놓은 탓이다.<끝> ☞안나 김은 한양대 도시공학과 졸업 후 LG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다 컬럼비아대학원에서 부동산개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뉴요커도 모르는 뉴욕’(한길아트)을 출간했다.

2011-03-03

[안나 김의 할렘에서 월스트릿까지-웹스터홀 (15)] 미국 최초의 나이트 클럽

맨해튼 이스트빌리지의 웹스터홀(Webster Hall)은 1886년 진보 인사들의 교류와 사교 목적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금방 미국 최초의 나이트 클럽으로 전환된, 12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지고 있는 곳이자 뉴욕에서 가장 큰 나이트 클럽이다. 특히 금주법 시대에도 이곳은 꽃집이나 보리물 집 따위로 위장하지 않고 당당하게 나이트 클럽의 역사를 이어갈 수 있었다. 당시 그 유명한 마피아 알 카포네가 이 곳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60년대에 웹스터홀은 매우 유명한 음악 스튜디오로도 사용되었다. 이곳에서 자신의 명작들을 만들어낸 특A급 고객은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의 배우 줄리 앤드류스를 비롯해 레이 찰스, 엘비스 프레슬리, 프랭크 시내트라 등이 있다. 1980년대에는 티나 터너, 에릭 크랩튼, 스팅·키스, 비비 킹, 건스 앤 로지스가 공연을 가졌고 1990년대에는 마돈나, 믹 재거, 심지어 빌 클린턴까지도 자신의 이벤트를 여기서 열었다. 요즘은 어셔, 린킨 파크, 넬리, 에이브릴 라빈 같은 젊고 새로운 가수들과 더불어 롤링 스톤스, 듀란듀란이나 프린스 같은 노장들도 여전히 콘서트를 한다. 거기에 그래미 시상식도, ‘아이언 셰프’ 일본편도, 그리고 모건 스탠리나 크리스티안 디오르 같은 회사의 이벤트도 여기서 열렸다. 2008년 이 건물은 역사적 가치가 있어 보존해야 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물론 한번 등록되면 엄청난 세금 감면 효과도 있지만 자기 건물임에도 함부로 손을 대기 힘들어지기 때문에, 주인의 완강한 저항 끝에 등록됐다. 나이트클럽 조명 전구알 바꿀 때마다 위원회에 전화해서 하나하나 승인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나라도 그러겠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건물 보존 노력은 정말 집요하고도 강하다. 11스트릿의 3과 4애브뉴 사이에 있는 이 건물 앞면은 좀 작고 허름하다. 할렘의 아폴로 극장처럼 뒤통수가 큰 녀석이라, 들어가보면 ‘어라, 속이 이렇게 넓다니?’ 하고 깜짝 놀란다. 지하를 포함해 4개 층인데, 층마다 다른 인테리어와 다른 장르의 음악이 있어 마음대로 옮겨 다니며 고를 수 있다. 지하층은 힙합·랩의 흑인 음악, 매우 끈적끈적한 소위 ‘부비부비’형. 1층은 1980~90년대 듣던 정겨운 음악을 튼다. 한번은 아파트를 나눠 쓰는 친구와 그녀의 박사과정 연구실 친구들이랑 우르르 이곳에 간 적이 있었다. 참 반듯해 보이던 그녀의 친구들이 지하를 금세 포기하고 위층에서 놀고 있던 우리와 합세했다. “아래층은 참 부적절한(Inappropriate) 방법으로 춤을 추더군”이라면서. 난 부적절이란 단어를 예전 빌 클린턴이 모니카 르윈스키와 성추문을 시인할 때 이후로 참 간만에 들었다. 그나마 이 클럽은 규모가 크고 오래돼서 양호한 편이라오. 2·3층의 커다란 아르데코 스타일 중앙홀은 유명 스타들이 공연을 열고 뮤직비디오나 영화를 찍는 곳인데, 평소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신기한 분장의 댄서들과 ‘나, 한 춤 춰’ 하는 친구들의 깜짝 무대 공연, 복장만 구경해도 신기한 퀴어(Queer)들과 전문 DJ들의 다양한 음악이 있다. 그리고 ‘시네마 천국’ 같은 오래되고 멋진 극장까지. 하지만 중앙홀은 지하·1층에 좀 사람이 차야 연다. 적어도 밤 12시 정도니 집에 가는 시간을 잘 계산해야 한다. ☞◆ 안나 김은 한양대 도시공학과 졸업 후 LG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다 컬럼비아대학원에서 부동산개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뉴요커도 모르는 뉴욕’(한길아트)을 출간했다.

2011-02-03

[안나 김의 할렘에서 월스트릿까지-7] 웹스터상, '큰 머리' 정치인 웹스터 업적 기려

센트럴파크 내 베데스타 테라스 서쪽으로 조금만 발길을 내딛으면 대니얼 웹스터의 동상<사진>이 있다. 웹스터사전을 만든 그 웹스터가 아니고, 미 의회 연방상원의원·국무장관을 역임한 정치가 대니얼 웹스터다. 정치적으로 반대편이던 미국 제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는 ‘썩은 심장의 웹스터’라고 극히 싫어했다지만, 미국 초기 역사에서 웹스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중 웅변가였다. 특히 연방제 논쟁에서 연방을 지켜내는데 명연설을 남겼다. 그의 심오한 사상이 뿜어낸 멋진 웅변은 링컨 대통령까지 영향을 미친 미국 역사의 큰 위인이다. ‘더 몰’의 동상군에 함께 서기엔 크기가 커서 이 곳으로 옮겨진 웹스터상은 사실 센트럴파크 내 수많은 동상 중 가장 인상이 나쁘다. 음험한 얼굴 표현과 커다란 머리, 상대적으로 땅딸막한 신체 비율이라니, 자신들의 역사 구석구석을 영웅화하기 좋아하는 미국인들이 어쩌다 이런 것인지 볼 때마다 늘 의아스러웠다. 조각가 토마스 볼은 소년 시절부터 웹스터의 열혈 팬이었다. 원래 화가였던 그는 스스로 웹스터의 흉상을 만들고, 혼자 불만족스러워하며 작품을 파괴하고 다시 만드는 작업을 했다. 그렇게 흉상을 완성했던 1852년 웹스터가 사망했다. 이에 즉각적인 추모 열기가 일어나 많은 사람이 조각가가 소장하고 있던 흉상을 복제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힘을 얻은 조각가는 70cm 정도의 조그마한 전신 동상을 만들었다. 그리고 작품 공개 첫날, 발빠른 아트딜러가 이 전신상의 권리를 샀다. 그렇게 이 동상은 미국에서 최초로 디자인 특허까지 내고 주물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어 전국적으로 팔려나간 청동상이 되었다. 이런 대중적 인기작의 한 복제품을 20년 동안 소유하고 있던 사람이 조각가에게 웅장한 크기로 다시 만들어달라고 의뢰한 것이 현재 센트럴파크에 있는 이 대니얼 웹스터 상이다. 대니얼 웹스터는 이렇게 달마대사의 현신 같은 부리부리한 얼굴에다 사실 당대에도 칭송받던 대두이시다. 대두를 칭송하다니. 동양인에게 드문 조막만한 두상은, 오밀조밀해서 화장도 잘 받고 팔등신 신체비율로 보이는 일등공신인지라, 대개 우리는 머리 작은 걸 매우 부러워한다. 하지만 원래 조그만 두상을 가진 서양인은 머리 크기에 별로 신경 안 쓴다. 심지어 머리 작다는 칭찬을 ‘네 외모는 부자연스러워’‘혹은 멍청해 보여’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도 하니, 머리 크기나 신체 비율에 대한 열망은 문화권에 따라 이렇게 다르다. 19세기의 미국 사람들 역시 대니얼 웹스터의 큰 머리야말로 그의 장대한 지식과 웅변의 힘이 뿜어져 나오는 원천으로 여겼다. 이에 당대의 언론인 올리버 다이어는 “웹스터의 큰 머리는 경이롭고…참으로 멋진 모습이다”고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사실 영화와 텔레비전 시대가 오고 나서야, 조그만 화면에 차지 않는 작은 얼굴을 선호하기 시작했지 싶다. 그 이전에 수많은 청중 앞에 직접 얼굴을 드러내던 연극과 웅변의 시대에는, 그 눈빛과 입 모양 하나하나가 멀리서도 잘 인식되는 큰 얼굴 쪽이 더 유리하지 않았을까. 이에 위인의 동상은 원래 그분의 삶에서 대중들이 가장 존경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법이다. 그렇게 그의 가뜩이나 큰 머리가, 이 동상에서는 더욱 크게 강조되었다. 그 덕에 대니얼 웹스터는 실제는 매우 큰 체격이었지만 매우 단신처럼 느껴지고, 아래쪽에서 올려다봐도 원근법이 그 큰머리 포스 때문에 주변에서 쫄아붙은 것 같다. ☞안나 김은 한양대 도시공학과 졸업 후 LG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다 컬럼비아대학원에서 부동산개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뉴요커도 모르는 뉴욕’(한길아트)을 출간했다.

2010-09-02

[안나 김의 할렘에서 월스트릿까지<6>오벨리스크] 센트럴파크에 세워진 '클레오파트라의 바늘'

센트럴파크를 창조한 프레드릭 로 옴스테드와 캘버트 보크스는 센트럴파크 부지 안에 커다란 메트로폴리탄뮤지엄을 들어서는 계획에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당대 실세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땅을 내주게 되었다. 처음에 메트뮤지엄은 조그만 건물로 쪼개, 최대한 센트럴파크를 가리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박물관의 약탈한 콜렉션이 늘어날 때마다 계속 건물이 증축돼 센트럴파크의 땅을 계속 갉아먹었다. 이에 초기의 쪼개진 건물은 현재의 커다란 증축 건물 안에 레고 블록처럼 숨어 있는 꼴이 되었다. 메트뮤지엄 뒤편으론 웬 고대 문자가 가득한 뾰족한 돌기둥, 오벨리스크가 하나 박혀 있다. 당연히 복제품이겠거니 하고 그냥 지나치곤 했다. 진짜라면 뭐하러 이렇게 바깥에 비를 맞게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오벨리스크는 진짜였다. 단지 이곳에 세워질 당시인 1881년 메트가 아담했기 때문에 이렇게 바깥에 세웠다. 게다가 이 오벨리스크는 이력서에 람세스와 케사르까지 엮은 대단한 것이다. 기원전 1450년 이집트 나일강 유역의 헬리오폴리스라는 도시에 파라오 투트모시스 3세를 위해 만들어진 오벨리스크다. 이로부터 200년 뒤 람세스 2세가 전쟁 승리를 기념하며 이 표면에 비문을 새겼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 군대가 와서 오벨리스크에 불을 질렀고, 지금까지도 표면에 남아 있는 검댕과 긁힌 자국이 있다. 기원전 12년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가 이것을 나일강 유역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수송했다. 이 오벨리스크를 ‘클레오파트라의 바늘’이라 부른 것은 로마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클레오파트라는 이 오벨리스크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하기 20년 전에 죽었다고 한다. 한편 수송하는 과정에서 오벨리스크 밑동의 각이 훼손되자, 로마인은 오벨리스크를 든든히 받칠 수 있는 황동으로 만든 게(crab)를 주조해 네 모서리 아래에 끼워넣었다. 이 황동 게 가운데 두 마리는 이집트에서 도둑 맞았고, 나머지 두 개는 뒤쪽 메트에서 보관하고 있다. 즉 현재 센트럴파크의 오벨리스크를 받치고 있는 깜찍한 황동 게는 다 복제품이다. 로마인들이 이집트를 떠나고 이 오벨리스크는 1301년 지진으로 무너진 채로 한동안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가 19세기에 재발견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이 한 쌍의 투트모시스 오벨리스크는 떨어져 따로 옮겨진다. 당시 유럽에선 ‘이집트 문명의 재발견’이 한창 유행이었다. 1833년 이집트의 다른 곳에 있던 오벨리스크 하나가 파리로 옮겨져 많은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1877년 이 투트모시스 오벨리스크 하나가 런던으로 넘어갔다. 그러자 뉴욕이 남아 있는 투트모시스 오벨리스크에게 눈독을 들였다. 파리도 런던도 가지고 있는 아주 멋진 그것을.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그룹은 철도 재벌 윌리엄 밴더빌트로부터 재정 지원을 약속 받았다. 이에 힘을 얻은 미국인들이 알렉산드리아로 넘어가 성조기를 오벨리스크 위에 덮고 미국의 재산임을 선언했다. 그리고 220t의 오벨리스크를 특별히 구입한 영국제 증기선에 싣고 1880년 뉴욕 스태튼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오벨리스크가 도착했다는 뉴스는 뉴욕 전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항구에서부터 나무로 만든 특별한 레일을 이용해 조심스레 사람의 힘만으로 옮겼다. 112일 만에 현재의 위치인 메트뮤지엄 뒷자리에 세웠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방향 그대로 조립하여 세운 이 오벨리스크 아래에는 1881년 당시의 타임캡슐을 묻었다. 성서·웹스터 사전·미 독립선언문 복사본·셰익스피어 작품·이집트로 가는 길 안내서 등이 그 내용물이다. ☞안나 김은 한양대 도시공학과 졸업 후 LG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다 컬럼비아대학원에서 부동산개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뉴요커도 모르는 뉴욕’을 출간했다.

2010-08-19

[안나 김의 할렘에서 월스트릿까지] <5> 미스 김 라일락…센트럴파크에 피어난 '한국의 꽃'

예전 외국 어느 땅에 너무도 아름답게 잘 자라고 있는 무궁화에 감동하여 이를 관리하는 측에 감사 편지까지 보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아마 그분이 센트럴파크에 오셔도 장문의 글을 쓰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연의 주체는 전 세계 250종이나 자생하고 있는 무궁화의 한 종류가 아니라, 우리 땅에서 우리도 모르게 수출되어 나간 ‘미스 김 라일락’이기 때문에 더욱 가슴 뭉클한 사연이 되지 않을까. 라일락, 우리말로는 ‘수수꽃다리’라고 불리는 이것은 해방 직후 미군정 직원 미더 박사가 북한산 자락에서 씨앗을 채취하여 미국에서 개량한 것이다. 당시 그는 자기 밑에서 일하던 한국인 타자수 호칭을 따서 ‘미스 김 라일락’이라 명명했다. 이렇게 미국땅에 흘러들어간 미스 김 라일락, 좋은 보랏빛 향기와 아담한 크기 때문에 미국 사람들이 정원을 꾸밀 때, 특히 분수 주변을 장식하는 데 쓰이며 인기가 높다. 이렇게 라일락은 그 유명한 맨해튼 센트럴파크에 당당히 입성하게 된다. 나움버그 밴드셸에서 약간 서쪽으로 가면 독수리와 먹잇감을 표현한 이글스 앤 프레이(Eagles and Prey)라는 이름의 동상이 있다. 그 동상의 대각선에 조성된 ‘싱어 라일락 길(Singer Lilac Walk)’은 1970년대 넬 싱어라는 사람의 기부로 만들어졌다. 특별한 팻말이 없기 때문에 찾아가는 시기가 봄이 아니라면, 그 야트막한 라일락 나무들이 군집한 모양으로 찾아야 한다. 이곳에는 미국에서 제일 흔한 네덜란드산에서부터 ‘링컨 대통령’이라는 이름의 라일락, 프랑스에서 개량된 향기 없는 중국산 라일락까지, 꽃이 피는 시기와 색깔에 따라 다양한 종이 살고 있다. 그리고 마치 한국 입양아들이 세계 각지에서 살아남아 그 존재감을 어느 날 우리에게 알려주듯, 이 ‘미스 김 라일락’ 역시 자신의 깊은 향으로 무시 못할 존재감을 내뿜고 있다. 물론 우리의 고유한 종자가 우리 모르게 해외로 반출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자원이 우리 힘이고 경쟁력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왕 이렇게 나와 우리 도움 없이도 미국 시장을 장악한 미스 김 라일락, 참 기특하다. 현재 미국의 대형 마트 안에 있는 원예 코너 어디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인기 있는 이 꽃을, 한국의 것이라 널리 알리며 앞마당에 잘 심어보는 건 어떨까. 한국인의 이미지란 미스 김 라일락처럼 짙은 향내를 풍기는 것. 우리는 라일락처럼 심성 그윽한 민족이라고 말이다. 예전에 어학원에서 어느 미국 선생이, 미국사람들이 일본문화를 몹시 떠받드는 탓에 미국말이 일본 단어를 많이 끌어안았다며 ‘만가, 쓰나미’를 비롯한 예를 수십 개씩 이야기 한 적이 있다. 그러다 문득 나를 힐끗 쳐다보며 “그런데 한국말은 그런 예가 별로 없어” 하는 거였다. 지금까지 미국말 안에서 김치·불고기·태권도·재벌 정도가 한국어로 뿌리 내린 말로 볼 수 있겠다. 이 숫자가 점점 늘어나면 우리나라의 위상도 느껴질 것이다. 이제 우리도 조금씩 우리의 세를 만들어나가자. 중국이나 멕시코 사람처럼 숫자로는 안 되니 소수정예 문화예술 천연자원 콘텐트로 조금씩 파고드는 것이다. “미스 김 라일락! 보살펴준 적도 없는데 이렇게 멋지게 살아남아서 정말 기특하고 고마워요. 수고스럽겠지만, 앞으로도 그 좋은 향기를 전 세계인이 찾는 센트럴파크에 계속 내뿜어주세요!” ☞안나 김은 한양대 도시공학과 졸업 후 LG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다 컬럼비아대학원에서 부동산개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뉴요커도 모르는 뉴욕’을 출간했다.

2010-08-05

[안나 김의 할렘에서 월스트릿까지] <4>리버사이드 교회…평화로운 공짜 전망대

성난 록펠러 가문이 기증 버나드칼리지와 맨해튼음대 사이에 난 오르막길을 따라가면, 121스트릿과 리버사이드드라이브에 위치한 리버사이드교회(Riverside Church)가 웅장하게 나타난다. 현재는 특별한 종파 없이 매우 진보적인 성향을 띠고 있는 이 교회는 미국 정치사에서 중요한 장이 되어왔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베트남전 반대 설교를 했고, 넬슨 만델라가 오랜 감옥생활을 마치고 미국에 왔을 때 처음 방문한 곳이다. 전 유엔 사무총장인 코피 아난이 9·11 사태 직후 연설을 했으며, 심지어 미국의 ‘공공의 적’ 피델 카스트로도 이곳을 방문했다. 이 성채 같은 리버사이드교회 전체가 록펠러 가문의 기증품이다. 사실 록펠러 주니어가 리버사이드교회를 짓기 바로 전에 당시 50만달러를 이웃한 세인트 존 더 디바인 성공회대성당에 기부하면서 위원회 자리를 요구했다.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록펠러는 뉴욕의 각종 유력 단체의 핵심 구성원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영국 식민지 시대부터 시작된 성공회가 뉴욕 내 종교단체 가운데 가장 큰 힘을 가졌기에 그는 자신이 그 위원회에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록펠러는 침례교인였던 탓에 대성당 쪽에선 헌금만 감사히 받고는 위원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1922년 파크애브뉴침례교회(Park Avenue Baptist Church)는 성전 신축공사를 하면서 록펠러 가문에 재정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록펠러는 괘씸한 세인트 존 디바인 대성당을 굽어볼 수 있는 큰 땅을 샀다. 그리고 13세기에 지어진 프랑스의 한 고딕성당을 모델로 이 장대한 리버사이드교회를 짓고 1930년 기증까지 전 과정을 가뿐히 마쳤다. 기증자 자신과 어머니의 이름도 로비에 박고 말이다. 록펠러를 차버린 성공회 대성당은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완공을 못하고 있다. 돈도 모자라는데다 처음부터 돌로 층층이 쌓아올려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전통 고딕축조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결국 최근에는 대성당 귀퉁이 부지를 잘라 신규 콘도 부지로 임대하고 말았다. 그런 피눈물 나는 노력으로 지금도 조금씩 대성당을 만들어 가고 있다. 반면 록펠러 가문에서 지어 기증한 이 리버사이드교회는 공사 진행이 빠른 강철 빔 구조로 내부가 설계되었다. 게다가 가문의 엄청난 재정 지원 덕분에 착공 후 6년 만에 화려하게 완공될 수 있었다. 1927년 완공 직후 큰 화재가 났지만 역시나 돈의 힘으로 빠르게 수습되었다. 그렇게 1930년 첫 예배를 드린 후 지금도 굳건히 잘 서 있다. 이 안에는 훌륭한 프리스쿨과 공연장까지 갖추고 있다. 게다가 그냥 매점이라 하기엔 매우 멋진 천장을 가진 곳에서 썩 괜찮은 점심도 판다. 이렇듯 억만장자의 마음이 한번 돌아선 결과는 크나큰 지역사회의 축복으로 귀결되니 덕을 보는 나 같은 소시민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교회 종탑 올라가기 리버사이드교회 안은 그 명성에 걸맞게 관광객을 위한 안내소나 기념품 판매소도 잘 되어 있다. 고딕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장엄한 예배당의 커다란 파이프 오르간이나 스테인드글라스, 록펠러 주니어가 사다 걸었다는 그림들도 좋다. 하지만 이 교회에서 가장 좋은 곳으로 가려면 유려한 옛날식 인테리어에 천장에 금별과 십자가가 가득한 근사한 진녹색 엘리베이터를 타야 한다. 20층 꼭대기 버튼을 누르면 미국의 종교 건축물 가운데 가장 높다는 종탑으로 이동한다. 20층은 22층 종탑 바로 아래의 창고로, 바로 위층과 좁은 계단으로 연결된다. 이곳에는 20t부터 약 5kg짜리까지 총 74개의 종이 있다. 통이 큰 록펠러 주니어가 어머니를 기리며 주문한 것이다.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주조된 종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하지만 이곳은 수리공사를 자주 하기 때문에 전망대 계단이 항상 막혀 있는지라 종 구경을 하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 대신 한적한 20층 창고 문은 자주 열려 있어서 창문 바깥을 내다보기에 좋다. 평온한 허드슨강 너머 그림 같은 뉴저지와 컬럼비아대의 고풍스러운 청동 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훌륭하고 평화로운 공짜 전망대를 즐기다보면, 이전에 20달러 정도를 내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나 록펠러센터 전망대 줄에 갇혀 있던 게 억울해진다. 요즈음 친구들이 놀러 오면 여기 종탑으로 데리고 와서 동네 구경을 한방에 시켜준다. 이렇게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인생을 내다보는 혜안이 히드라 촉수만큼이나 자라지 않을까 싶다. ☞안나 김은 한양대 도시공학과 졸업 후 LG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다 컬럼비아대학원에서 부동산개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뉴요커도 모르는 뉴욕’을 출간했다.

2010-07-22

[안나 김의 할렘에서 월스트릿까지-2] 아폴로 시어터…흑인문화의 정수를 느낀다

1940년대 빌리 할리데이와 듀크 엘링턴이 이 곳에 섰고, 1960년대에는 스티비 원더와 다이애나 로스가 무대에 오르곤 했다. 아폴로 시어터(Apollo Theater)는 125스트릿, 애덤 클레이턴 파월 주니어 블러바드(7애브뉴)와 프레드릭 더글러스 블러바드(8애브뉴) 사이에 있다. 도로에 접한 부분은 매우 좁고 초라하지만 뒤통수 부분이 매우 길고 커서 뒤쪽으로 천장 높은 공연장을 품고 있다. 이곳은 1914년 시작해, 할렘 흑인문화의 정수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초기에는 흑인의 입장을 거부했지만 인근 라파예트 극장을 성공적으로 운영한 사업가가 1934년 인수한 다음 흑인 전용 극장이 되었다. 같은 해 모든 흑인가수의 등용문이라는 아마추어 나이트가 시작되었다. 뮤지컬과 영화로도 만들어진 ‘드림걸즈’의 첫 장면, 세 명의 여자가 가발을 돌려쓰고 나가던 바로 그 경연대회다. 텔레비전으로 방송되는 아마추어 나이트를 본 사람이라면, 레드 벨벳 객석으로 가득 찬 아폴로 시어터 홀이 방송에서 본 것보다 좀 작다고 느낄 것이다. ◇시 랜드마크=소년 시절부터 이곳에서 ‘심부름 보이’로 일하기 시작해 지금은 아폴로시어터 역사의 산증인으로, 양복에 행커치프를 갖춰 입고 안내해주는 자그마한 할아버지 빌리 미첼이 설명했다. “방송할 땐 홀이 좀 넓어 보이게 하는 특수 렌즈를 쓰거든….” 지금은 건물 자체도 뉴욕시 랜드마크로 지정되어, 로비의 샹들리에를 비롯한 많은 부분이 전성기였던 1940년대 스타일로 복원된 상태다. 로비에는 지금까지 이곳에서 공연했던 수많은 스타의 사진을 오려 패널에 붙인 커다란 콜라쥬가 있다. 이 패널은 원본이라서 단독으로 사진 찍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것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는 부분에서만 촬영할 수 있다고 주의를 단단히 준다. 할아버지는 “스티비 원더가 열네 살, 내 나이 열다섯 살 때 이곳에서 처음 그를 만났지. 근데 그때 그가 나보다 한 살 많다고 속였단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러면서 아홉 살짜리 마이클 잭슨도 봤다 하고. 그 뒤 이곳은 할렘의 침체와 더불어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으로 바뀌었다가 1980년대에 음악홀로 재탄생했다. 1990년대 들어서는 뉴욕주가 이 극장을 사들여 개보수를 거쳤고, 아마추어 나이트가 전국방송을 타기 시작하면서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다. 이곳은 흑인문화의 기념비적인 뮤직홀이지만 상당히 많은 수의 백인, 존 레논과 오노 요코·콘·비요크도 공연했다. 2008년에는 일본의 와다 아키코가 이곳에서 동양 가수로는 처음으로 단독 공연했다. 1950년생 와다는 일본 R&B의 창시자로 아폴로시어터에서 데뷔 40주년 기념공연을 열었다. 큰 체구와 풍부한 성량, 철저한 인맥관리와 독설로 일본 연예계의 여제로 불리는 와다의 본명은 김복자(金福子), 사실 재일교포다. ◇마이클 잭슨 추모=2009년, 이곳에서는 아주 특별한 아마추어 나이트가 열렸다. 마이클 잭슨 사망 직후의 뜨거운 추모 열기를 느낄 수 있는 공연이었다. 마이클 잭슨 역시 어릴 때 이 무대에 섰다. 그러니 흑인문화의 정수 격인 아폴로시어터가 지역사회와 함께 하는 추모의 장을 여는 건 너무 당연했다. 뉴욕타임스에 “마이클 잭슨을 추모하고자 하는 사람은 오늘 오후 아폴로시어터로 오세요. 그리고 이번 주 아마추어 나이트의 참가자들은 마이클 잭슨의 춤과 노래만을 헌정합니다”란 글귀가 떴다. 그날, 나는 주저 없이 극장 앞에 나갔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끝도 없는 줄과 마이클 잭슨을 기리며 손수 제작한 플래카드와 꽃들이 보였다. 바로 인근에 위치한 뉴욕 주청사 건물은 아예 조기를 내걸었다. 각종 방송사 차량을 비롯해 여러 대의 소방차와 경찰차가 출동해 교통을 통제하고 있었다. 마이클 잭슨의 추억을 함께 이야기하며 뙤약볕 아래서 우산을 들고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은 참으로 질서정연했다. 그렇게 공통분모를 잃은 집단의 슬픔이 내 호흡기관으로, 살갗으로 따끔따끔하게 전해져 왔다. 그날 이후에도 아폴로시어터 앞은 마이클 잭슨 모양의 그래피티와 꽃들이 바닥을 덮었고, 흰 천이 내걸린 곳에는 방문하는 사람들의 메시지가 빼곡 찼다. 예전에는 125스트릿을 따라 걸으면, 말콤 엑스를 비롯한 흑인문화의 아이콘을 이미지화해서 파는 상품들이 눈에 띄었다. 오바마 열풍이 불면서 그의 얼굴을 지폐 모델로까지 만들어 파는 상품이 등장했는데, 이제는 마이클 잭슨의 이미지가 거리를 압도하고 있다. 탈색된 얼굴에 무너진 분필코가 아니라, 흑인 특유의 커다란 곱슬머리에 뭉툭한 코를 가졌던 청소년기의 귀여운 마이클 잭슨이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은 게다. ▶안나 김은 한양대 도시공학과 졸업 후 LG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다 컬럼비아대 건축대학원에서 부동산개발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뉴요커도 모르는 뉴욕’을 출간했으며, 6월부터는 LA를 구석구석 탐험할 예정이다.

2010-06-10

[안나 김의 할렘에서 월스트릿까지 <1>가스펠 교회] 일요일마다 관광객 넘쳐나

컬럼비아대 건축대학원 부동산개발학과를 졸업한 안나 김씨가 귀국 후 ‘뉴요커도 모르는 뉴욕’(한길 아트 간)을 출간했다. 뉴욕에 이민와 살지만 맨해튼을 얼마나 알고 있나? 김씨가 유학 시절 할렘에서 월스트릿까지 뉴욕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뉴욕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준다. 그 첫번째 이야기는 할렘의 가스펠교회다. 편집자 맨해튼 138스트릿과 애덤 클레이턴 파월 주니어 블러바드(7애브뉴)와 말콤엑스 블러바드(6애브뉴) 사이에는 애비시니언 침례교회(Abyssinian Baptist Church)가 있다. 할렘을 대표하는 이 교회는 1808년 자유흑인일지라도 교회 2층 좌석에 앉아야 하고 그들의 좌석이 노예 갤러리라 불리는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시작됐다. 이 교회는 뉴욕이 팽창할 때마다 도시 외곽으로 밀려나는 흑인 커뮤니티 지역, 즉 로어 맨해튼·그리니치 빌리지·미드타운 등지의 흑인 게토 지역과 운명을 함께 했다. 그리고 애덤 클레이턴 파월 시니어 목사가 기금을 조성해, 흑인들이 적극적으로 유입되던 1920년 현재의 할렘으로 이전했다. 이후 아들인 애덤 클레이턴 파월 주니어가 목사직을 맡으면서부터 이 교회는 최대 중흥기를 맞게된다. 흑백혼혈의 준수한 외모에 엄청난 카리스마로, ‘당대의 오바마’였던 목사는 할렘의 대표적인 정치·사회적 지도자였다. 흑인에게 물건을 팔긴 하지만 흑인점원을 고용하지 않았던 할렘의 백인가게들을 상대로 ‘일할 수 없는 곳에선 쇼핑하지도 말라(Don’t Shop Where You Can’t Work)’는 내용의 보이콧을 성공적으로 전개시켰다. 이렇게 해서 세계 최초의 흑인 산타클로스 점원을 만들어내기에 이른다. 또한 그는 1944년 당시 백인 지역이었던 할렘을 대표하는 첫 번째 흑인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1972년 사망 직전까지 활동했다. 이곳의 예배는 할렘의 핵심 교회답다. 영화 ‘시스터 액트’를 생각하면 된다. 애비시니언 침례교회는 열정적이고 신나는 가스펠로 매우 유명한지라, 많은 외부인이 예배를 찾는다. 외부인이 예배를 참관할 수 있는 일요일 11시에는 백인 관광객과 알음알음 온 사람들, 게다가 관광회사에서까지 단체로 오기 때문에 교회 앞이 참 소란스럽다. 그래서 교회 측에선 교회 신도를 먼저 다 앉히고 난 후에야 관광객을 2층으로 안내한다. 한 세기 전과 지금은 상황이 역전되어 백인관광객이 2층에서 예배를 참관한다. 뉴욕에는 워낙 대규모 예배당이 많은 탓에, 이 교회의 내부는 오히려 작게 느껴진다. 특이한 점은 음악 공연장 같기도 하고 마당놀이 무대 같기도 한 둥근 원형의 교회 내부다. 이윽고 예배가 시작되면 기다리던 그들이 입장한다. 성가대원들은 치렁치렁한 성가대복을 입고, 신도들이 앉아 있는 긴 의자 사이 통로로 수퍼스타처럼 걸어 들어와서는 자랑스럽게 자리로 올라간다. 그들이 유명인사가 된 바람에 예배 중에는 사진 촬영이나 녹음·녹화도 금한다. 흑인사회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위상은 종교를 넘어선다. 교회는 지역공동체의 끈끈한 대화와 소통의 장이다. 그래서 예배 첫머리에 “누가 무슨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누가 뭘 했습니다” 등의 신도들의 소식이 한참 공표된다. 그러면 사람들은 양손을 번쩍 치켜들고 박수치며 축하하고, 서로 꼭 끌어안으며 부산스레 대화한다. 목사의 설교 중에도 신도들은 잠시도 조용히 있질 않는다. 한 문장 한 문장마다에 “예수님! 감사합니다. 주여(Yes, Jejus! Thank you, Lord)” 식의 외침을 여기저기서 받아친다. 보고 있자면 마치 우리네 마당놀이에서 무대와 하나되는 관중의 모습이나 판소리의 추임새를 떠올리게 한다. 이곳 예배나 마당놀이나 모두 한쪽 벽을 바라보는 수직구조가 아니라 둥그런 무대와 이를 에워싼 사람들이 하나되는 호응의 장이다. 이렇게 이곳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종교 시설에서 지켜야 할 절대엄숙이 아닌, 화끈한 소통의 축제가 일어난다고나 할까. 거기에 성가대가 기막히게 멋진 노래라도 부르면, 감동한 사람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따라 부르고 몸까지 흔들어댄다. 비록 소통의 축제지만 예배에 오는 사람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차려입고 온다. 이곳은 우리가 할렘에 대해 가지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힙합바지에, 목에다 쇠사슬 두르고 해골반지 주렁주렁 낀 채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의 흑인이 오는 곳은 절대 아니다. 언젠가 신문 패션란에도 일요일 애비시니언 침례교회 옷차림이 화보로 한가득 났을 정도니까. 꽃 달리고 챙 넓은 모자를 쓴 노부인, 구김 없는 양복에 손수건까지 꽂은 멋쟁이 흑인 상류층과 지식인이 최대한 한껏 깔끔하게 잘 갖춰 입고 예배드리러 온다. 간혹 슬리퍼에 반바지·민소매 입고 한참이나 지각해서 들어와선, 가스펠 구경 다 끝났다고 벌떡 일어서는 관광객이 있다. 교회에서는 이들에 대해 넌더리 내며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우리의 일요일 예배는 뮤지컬 콘서트가 아닙니다. 제발 복장과 태도를 단정히!”이 가스펠 예배 참석은 무료지만 조그마한 헌금은 환영하고 있다.

201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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